내 인디 달링 – 첫번째

처음에는 그를 외모와 나이와는 별개로 소년 감성을 지닌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이많은 사람이라고 다 어른이 됬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본질적인 내면의 나이는 저마다 다 다르니까.

그 사람과는 취향이 묘하게 맞고, 묘하게 빗겨나간다. 내가 엄청 좋아했던 것들을 그 사람은 어? 나 그거 알긴 알아 정도로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내가 적당하게 좋아했던 것들을 그 사람은 굉장히 좋아한다고 표현했다. 나는 거기서 “아… 안 맞는구나”라고 맞지 않음을 부정했으나 그는 “그러니까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거고. 이만큼 맞는 것도 정말 잘 맞는 거 아니겠어?”라고 반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어쩌면 굉장히 잘 맞는 취향의 사이가 아닐까 싶기도 해. 너무 취향이 똑같으면 재미없잖아?

타인. 그것도 낯선 남자. 이 만남 자체는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보통은 온갖 흉흉한 세상에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도 모른다는 겁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알고있는 지식 내에서는 별 무서울게 없었다. 실은.. 잠깐 하룻밤의 불장난이나 지르지모..하는 잘 모르는 세상을 겁 없이 걸어나가려는 수작이었다. 자칫 잘못해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뒷감당이 생각보다 정말 무서운 거라는 걸 모른채. 뭐 어쨌거나 저쨌거나 다행인 건, 이 사람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

웬 별의별 주제로 잡담을 하루 온종일 떨었다. 취향에 맞는 이야기, 노래 이야기,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건너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던 이야기까지. 어눌한 내 표현력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풀이해준다. 나는 이상하게 다 말하게 돼버렸고, 그 사람은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공감했다. 정말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음.. 어쩌면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은 어쩌면 내 일방적인 감정일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은 관찰력이 좋고 눈치가 빠르다. 그 사람은 나와 달리 감성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객관화 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확실한다. 상대방은 저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율한다. 서로 최대한 윈윈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알고 보니 그는 지나온 세월을 겪으며 성격적인 성향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

횡설수설하는 말 안에 들어있는 자기 철학과 본인 입으로는 인생 막 산다고 하면서도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태도, 소년시절에나 할 법한 행동 속에 어른의 매너. 처음 본 사람에게서 나는 그 사람의 다양함을 보았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과의 첫 만남 뒤에 나는 ‘검정치마’의 ‘나랑 아니면’ 이라는 노래를 내내 듣고 있었다.

행렬안의 사람들

 황금연휴에 나는 가난에 묶여 어디로든 선뜻 나서질 못했다. 금전적인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어디로든 나가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의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휴일의 의미란 무엇일까. 신선한 힐링이 아닐까? 빠듯한 금전사정을 감안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누릴만한 장소를 물색해봤다. 문득 한강다리에 있는 카페들이 떠올랐다. 제대로 가 본적은 없지만 특유의 매력이 있을것 같다는 편견이 생겼다. 어차피 갈만한 곳도 없던 나는 소소한 마실의 목적지를 집과 가까운 한강카페으로 향했다.  

 동작대교에 위치한 카페 구름은 2층과 3층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2층의 창문은 한강공원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었고, 3층은 동작대교와 그 뒤에 펼쳐지는 한강, 여의도, 그리고 일몰이 펼쳐져 있었다. 전체적은 풍경은 2층이 조화로웠지만, 나는 일몰이 펼쳐지는 햇빛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3층으로 향했다.

3층에 앉았다. 흘러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본다. 이건 전적인 내 시점에서 바라보는 모습들이겠지. 차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실제 자동차들은 운전자 스스로의 목적의지들로 스스로의 행선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겠다 싶은 시시껄렁하고도 무의미한 생각들.  그 사이로 이따금씩 긴 행렬이 스쳐 지나간다. 유독 눈에 띈다. 생각지도 못한 이질감으로 시선을 뺏긴다. 당연하지, 너무 크니까.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행렬에는 ‘당고개’라고 쓰여져 있었다. 행렬안에는 사람들이 뭉쳐있다. 내 동체시력으로는 그 안에 사람들이 몇명 있는지 셀 수있은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 안의 사람들이 북적이게 가는지 한산하게 가는지는 가벼운 눈찌검으로 가늠할 수는 있겠다 싶어 세어보기도 해본다. 

다시, 눈에 띄는 행렬이 지나간다. 나는 하염없이 행렬안의 빛, 빛 아래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전철 안에는 비어있는 의자가 많았다. 다행히 내 시력만으로도 사람들이 무슨 행위를 하는지 어렴픗이 보였다. 한산했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 턱이 없겠다만, 적어도 불쾌함만큼은 딱히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이것은 그동안의 경험에 기반해 그들이 느끼지 않을 감정을 멋대로 단정짓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단지 그들보다 고도가 높은 곳에 앉아있다는 이유로 일어난 우월함의 착각은 잠시뿐이었다. 해가 온전히 사라졌다. 가진거라곤 몸뚱아리 뿐인 작고 작은 인간은 도시가 제공해주는 행렬안에 들어가야 집으로 갈 수 있다. 나 역시도 돌아가려면 큰 흐름에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행렬안의 사람들이 되어 집으로 향했다.

이따금씩 4호선을 탄다. 4호선의 열차는 동작대교를 통해 한강을 지나친다. 한강카페에서 바라보는 다리는 생각 외로 시각적인 재미를 준다. 누군가는 이런 내 모습을 행렬안의 작은 점으로 인식할지도 모를 일이지.

별일은 아닌데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단지 업무시간에 생기는 졸림과 따분함이 이끄는 대로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읽지 않은 카톡이 4개 정도 도착해 있었다.  거의 활동하지 않는 (혹은 나대지 않는) IT 업종 소모임의 공지방의 카톡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소소하게 한강에 모여 사진 스터디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투의 소모임을 알리는 내용이었고, 몇몇 사람이 이런 모임이 있네요~ 라고 답글을 하듯이 누군가가 톡을 날린 상태였다. 

 사진이라… 최근에 사진에 대한 흥미가 생겼지만 자유롭게 찍지는 못한다. 인물 사진을 좋아하지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사진에 찍혀줄 지인이 없다. 친구들은 자신이 사진에 찍히는 걸 싫어한다. 누군가와 같이 사진을 찍는 행위를 거의 하진 않는다. 인물 사진을 찍는 건 마음 아래로 삭히고, 혼자 풍경을 찍곤 한다. 아쉬우면서도 속은 편하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기에, 시간과 여유가 넉넉한 날이 되어야만 겨우 누군가를 만나러 나갈 수 있다. 그런 나의 정신적 여유를 봐서는 이번 주에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행위는 힘들 것 같았다. 이번 주 일요일에 아주 가끔 만나는 지인과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근데, 물리적으로는 시간 여유가 있잖아? 그냥 가서 새로운 사람들이랑 사진 찍는 거 어때? 나를 깨트리는 도전을 하기로 했던 올해의 계획이 문득 생각났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념 속 고민의 흐름은 지금의 주제와는 무관한, 이를테면 슬슬 시작해야만 하는 겨울옷 정리에 대해서까지 새어 나갔다. 아, 이번 주에 원래 겨울옷 정리하려 했지? 못 가겠네? 어차피 이번 주 계획은 일요일에 지인을 보려 했던 약속 뿐이었잖아? 나는 그렇게 그 모임에 참석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했다. 번복할 생각은 없다. 다만, 어딘가에 표현하기 힘든 찜찜한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그 마음을 털어내고 싶다는 욕구를 거짓말로 포장해서 카톡으로 보냈다. ‘시간이 안돼서 모임에 못 갈 것 같아요. 아쉽네요~’라고. 

아차 했다. 

여기는 공지만 올리는 카톡방이었다. 잡담을 나누면 안 되는데 나는 규칙을 어겼다. 바쁘면서도 일일이 카톡 확인을 하는 누군가가 몇 초의 시간을 공들여 알림을 확인하는데, 쓸데없이 규칙을 어긴 말이 적힌 글을 본의 아니게 읽게 되어 시간 날렸다고 짜증 낼 사람이 몇 명 있겠다는 예상이 들었다. 내가 민폐를 끼쳤구나… 순간 죄책감에 휩싸였다. 나는 곧바로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사과했다. 죄책감의 감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내 글에 반응하지 않았다. 30여 분 정도 지나자 카톡 방을 관리하는 운영진이 대뜸 장문의 필독 글을 올렸다. 공지방에 카톡을 쓸 때 운영진의 허락 없이는 올리는 걸 자제하라는 말이었다. 필독 글이 올라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쓴 톡들과 나 이전에 이런 모임이 있다는 투로 얘기한 몇몇 사람들의 톡이 지워졌다. 지워진 글의 흔적은 어느새 변경된 소모임에 대한 공지글로 뒤덮여졌다.

별일은 아닌데, 나는 잠이 오질 않는다.

나와 내면의 어린아이

“마음은 여전히 소녀, 소년인데..” 어른이 되고서 귀에 잘 들어오는 말 중에 하나다. 어른이 되면서, 유독 귀에 들어오는 건 아마도 그저 동안이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일까. 몸은 하루가 다르게 쉽게 피로해지고 늙어가는데, 내면의 나이는 좀체 오르지 못한다. 몸의 나이와 내면의 나이가 같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인군자가 되어있겠지.

6살.. 7살…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때부터인가… 어느샌가 나는 어릴 때의 기억이 서서히 없어지고, 내 안의 내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 인듯 내가 아닌듯한 내 생각. 나인 듯 내가 아닌 생각은 내 머릿속에게 외친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도 언젠가 사라지겠지. 죽기 싫다.’라고. 다 같이 즐겁게 집에 가던 길에 ‘죽기 싫다’고 외쳐댄 나. 그런 나를 황당해 하는 친구들. 지금 내가 떠오르는 가장 어릴 때의 최초의 기억이다.

그때 이후로 종종 너무 심심할 때면, 나는 내면의 나와 언제나 이야기한다. 내가 맞지만 내가 아니다. 내면의 어린아이는 이따금 나 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생각을 떠올리곤 하니까. 내면의 어린아이인 나를 철학적 자아인 나와 분리시키며 허공에서 나는 나와 대화를 한다. 그런 내면의 나와의 이야기를 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내면의 아이는 몸의 나이가 먹는 만큼 자라나지 않는다. 자아라는 걸 자각하게 된 6살 즈음부터 태어났으니 내 신체보다 더 어릴 수 밖에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지. 그렇다고 몸이 자라난 만큼 내면은 같이 자라나주지 않는다. 정신을 자극시킨다고 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너무 어린 아이여서 지나친 자극은 주려 하면 이 아이는 아파한다. 그리고 내 몸은 이 아이가 아픔에 도망치려하는 본능으로 지배되고 유혹당한다. 유혹당하지 않게 되더라도 자극에 상처받은 아이는 내면 어딘가를 찌른다. 그러면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순간적인 쾌락에 잊어보려 할 수도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흥으로 내면의 어린아이가 찌르는 상처를 애써 지워보려 하는데, 나는 그게 힘들었다.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곳을 찾다보면, 그 곳에서 내면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위치를 알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눈물로 이 아이의 상처를 씻어주곤 한다.

나를 분리해서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눌 때는, 뭔가에 깨달았을 경우다. 새로운 걸 배울 때도 있고, 경험할 때도 있고. 종류에 상관없이 무언가에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 나는 언제나 내 내면으로 몇 번을 더 곱씹곤 한다. 그 깨달음 중에 나의 실수나 잘못은 더더욱 곱씹게 된다. 한때는 트라우마같이 따라오기도 한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남에게도 서슴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곱씹는다. 그리고 나선 어느샌가 그 실수는 기억에 아련히 스며들듯 녹아든다.

물론,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길 정도로 내가 잘못을 저지른 일을 기억할 때면 언제나 가시처럼 건들면 아파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내 잘못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아픔을 안고 간다. 물론, 내가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트라우마 없이 작은 상처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정도로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내 내면의 어린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아파 괴로워하며 죽을지도 몰라 나는 내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나쁜 일 저지르고 살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신기하게도 내면 깊이 있는 나와 밖에서 활동하는 내가 성격이나 생각이 점점 달라진다. 본질은 같다. 다만, 바깥에서의 어른이 된 모습인 활동하는 나는 내면의 어린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내면의 어린 나를 존중한다. 어떤 일이 생길 때, 밖에 있는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 내면의 부끄러움을 밝힌다. 그리고 그 내면의 부끄러움의 정체가 뭔지 하나씩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최근에 투자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다시 깨달았던 것은 학창시절에 수학을 포기했던 거, 대학교 때 배우고 싶은 수업들이 있었지만 시간을 핑계, 재료비를 핑계로 듣지 않았던 것. 그 모든 것들이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못한 나의 나약함이란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면에 어린아이에게 말해준다. “너는 그동안 변명만 하면서 앞으로 한 발짝 나가는 걸 피했던 거야”라고.

뭐, 그렇다고 당장 이것저것 도전하는 나로 바뀌진 못한다. 사람이 언제는 쉽게 바뀌곤 했나.

쉽게 내가 변하진 못하더라도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면서 내면의 나한테 “너는 지레 겁먹고 회피하려고 하니까 조심해”라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나에게 주의를 조금이라도 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음… 뭐. 그것도 내 착각일지 모른다. 착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는 이럴 때면 내면의 나와 상의할 수 있는 내가 좋으니까. 그리고 내 안의 어린아이도 정말 좋아한다.

어리기 때문에 소중히 감싸주고, 성숙해지도록 배워야 하고, 너무 지친다 생각되면 적당히 휴식을 취해주고. 사회에서의 나의 나이에 내면을 억지로 맞추지 말자. 내면은 내 나이대로 자라고 늙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성장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도 말자. 어쩌면 내가 태어난 목적을 내면의 어린아이가 쥐고 있을테니까. 이 아이가 자라도록 돌봐주다 보면 나와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되지 않을까?

의외로 내면의 나와 매일매일 소통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 나와 나를 분리하면서 언제나 상의를 하며, 성장에 대해 고민하는 게 어쩌면 내가 가진 큰 장점이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