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면의 어린아이

“마음은 여전히 소녀, 소년인데..” 어른이 되고서 귀에 잘 들어오는 말 중에 하나다. 어른이 되면서, 유독 귀에 들어오는 건 아마도 그저 동안이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일까. 몸은 하루가 다르게 쉽게 피로해지고 늙어가는데, 내면의 나이는 좀체 오르지 못한다. 몸의 나이와 내면의 나이가 같다면, 그 사람은 이미 성인군자가 되어있겠지.

6살.. 7살…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 때부터인가… 어느샌가 나는 어릴 때의 기억이 서서히 없어지고, 내 안의 내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 인듯 내가 아닌듯한 내 생각. 나인 듯 내가 아닌 생각은 내 머릿속에게 외친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도 언젠가 사라지겠지. 죽기 싫다.’라고. 다 같이 즐겁게 집에 가던 길에 ‘죽기 싫다’고 외쳐댄 나. 그런 나를 황당해 하는 친구들. 지금 내가 떠오르는 가장 어릴 때의 최초의 기억이다.

그때 이후로 종종 너무 심심할 때면, 나는 내면의 나와 언제나 이야기한다. 내가 맞지만 내가 아니다. 내면의 어린아이는 이따금 나 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생각을 떠올리곤 하니까. 내면의 어린아이인 나를 철학적 자아인 나와 분리시키며 허공에서 나는 나와 대화를 한다. 그런 내면의 나와의 이야기를 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내면의 아이는 몸의 나이가 먹는 만큼 자라나지 않는다. 자아라는 걸 자각하게 된 6살 즈음부터 태어났으니 내 신체보다 더 어릴 수 밖에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지. 그렇다고 몸이 자라난 만큼 내면은 같이 자라나주지 않는다. 정신을 자극시킨다고 성장하지 않는다. 여전히 너무 어린 아이여서 지나친 자극은 주려 하면 이 아이는 아파한다. 그리고 내 몸은 이 아이가 아픔에 도망치려하는 본능으로 지배되고 유혹당한다. 유혹당하지 않게 되더라도 자극에 상처받은 아이는 내면 어딘가를 찌른다. 그러면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순간적인 쾌락에 잊어보려 할 수도 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흥으로 내면의 어린아이가 찌르는 상처를 애써 지워보려 하는데, 나는 그게 힘들었다.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곳을 찾다보면, 그 곳에서 내면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위치를 알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는 눈물로 이 아이의 상처를 씻어주곤 한다.

나를 분리해서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눌 때는, 뭔가에 깨달았을 경우다. 새로운 걸 배울 때도 있고, 경험할 때도 있고. 종류에 상관없이 무언가에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 나는 언제나 내 내면으로 몇 번을 더 곱씹곤 한다. 그 깨달음 중에 나의 실수나 잘못은 더더욱 곱씹게 된다. 한때는 트라우마같이 따라오기도 한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남에게도 서슴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곱씹는다. 그리고 나선 어느샌가 그 실수는 기억에 아련히 스며들듯 녹아든다.

물론,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길 정도로 내가 잘못을 저지른 일을 기억할 때면 언제나 가시처럼 건들면 아파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내 잘못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아픔을 안고 간다. 물론, 내가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트라우마 없이 작은 상처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길 정도로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내 내면의 어린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아파 괴로워하며 죽을지도 몰라 나는 내 내면의 어린아이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나쁜 일 저지르고 살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신기하게도 내면 깊이 있는 나와 밖에서 활동하는 내가 성격이나 생각이 점점 달라진다. 본질은 같다. 다만, 바깥에서의 어른이 된 모습인 활동하는 나는 내면의 어린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나는 언제나 내면의 어린 나를 존중한다. 어떤 일이 생길 때, 밖에 있는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내 내면의 부끄러움을 밝힌다. 그리고 그 내면의 부끄러움의 정체가 뭔지 하나씩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최근에 투자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다시 깨달았던 것은 학창시절에 수학을 포기했던 거, 대학교 때 배우고 싶은 수업들이 있었지만 시간을 핑계, 재료비를 핑계로 듣지 않았던 것. 그 모든 것들이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 지레 겁먹고 도전하지 못한 나의 나약함이란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면에 어린아이에게 말해준다. “너는 그동안 변명만 하면서 앞으로 한 발짝 나가는 걸 피했던 거야”라고.

뭐, 그렇다고 당장 이것저것 도전하는 나로 바뀌진 못한다. 사람이 언제는 쉽게 바뀌곤 했나.

쉽게 내가 변하진 못하더라도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면서 내면의 나한테 “너는 지레 겁먹고 회피하려고 하니까 조심해”라고 이야기하면서 내가 나에게 주의를 조금이라도 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음… 뭐. 그것도 내 착각일지 모른다. 착각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나는 이럴 때면 내면의 나와 상의할 수 있는 내가 좋으니까. 그리고 내 안의 어린아이도 정말 좋아한다.

어리기 때문에 소중히 감싸주고, 성숙해지도록 배워야 하고, 너무 지친다 생각되면 적당히 휴식을 취해주고. 사회에서의 나의 나이에 내면을 억지로 맞추지 말자. 내면은 내 나이대로 자라고 늙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성장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지도 말자. 어쩌면 내가 태어난 목적을 내면의 어린아이가 쥐고 있을테니까. 이 아이가 자라도록 돌봐주다 보면 나와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되지 않을까?

의외로 내면의 나와 매일매일 소통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 나와 나를 분리하면서 언제나 상의를 하며, 성장에 대해 고민하는 게 어쩌면 내가 가진 큰 장점이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밤이다.